욕조마개 도둑(부제:왼손이 하는 일을 머리가 알게 하라!)
며칠 전의 일이다. 며칠간의 여행과 손님 접대를 마치고, 오랜만에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음을 즐거워하며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3일간 또 다른 여행을 가야 하는 처지라 잠시 시내를 다녀왔다. 이것저것 살 것도 있고, 은행 볼일도 보고, 오랜만에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도 먹을 겸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워낙 시장 구경, 사람 구경을 좋아해서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주인이나 종업원이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이 가게, 저 가게를 둘러 아이 쇼핑하는 것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래서 난 싱가포르에서 중고 벼룩시장과 다이소를 제일 좋아한다. 어쨌거나 그날 그렇게 나는 쇼핑센터가 있는 부킷바톡 역 주위로 나갔고, 그래서 나는 도둑놈이 될 뻔했다.
싱가포르에는 동네마다 할인 잡화판매장이 있다. 어찌 보면 마트 같기도 한데, 화장실 변기 부속부터 샴푸, 벽지까지 잡다한 공산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한다. 그리고 이곳은 보통 마트보다 20-30%로 가격이 저렴하고, 항상 사람이 붐빈다. 우리나라에서 덤핑 물건이라 불리는 물건과 같은 종류의 물건들을 파는 가게인 듯싶다. 이곳에는 내가 미처 한국에서 보지 못한 상품들도 많이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때론 저렴한 가격에 필요한 물건을 사고 나서, 온종일 나 혼자 즐거워하기도 한다.
그날도 은행 일을 마치고, 어김없이 지나는 길에 있는 큼지막한 잡화상에 들어갔다. 딱히 무엇이 사고 싶어서가 아니라 혹시 집에 필요한 것이 없나 둘러보기도 하고, 다른 곳과 가격도 비교하기도 하는 재미로 그냥 방문한 것이다. 이것 저것을 둘러보다가 집에 필요한 제품을 하나 발견했다. 이때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좀 과장하면 마치 폐쇄된 금광에서 금을 주운 듯한 기분이다. 뭐 요즘 말로 득템한 것이다. 그날 발견한 아이템은 욕실 욕조 마개였다. 현재 사는 집 욕조에 마개가 맞지 않아서 욕조에 따듯한 물을 받아 한국식 목욕을 하려고 하면 물이 조금씩 센다. 그래서 전부터 사고 싶었는데, 어디서 파는지 몰라 구하지 못했다. 그런데 드디어 이곳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니 아니 기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마개의 크기가 여러 종류가 있어서 어느 것이 우리 집에 맞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한참을 여러 가지 크기의 마개를 만졌다 놓았다 하면서 크기를 재다가 결국은 배가 고파 잠시 후에 다시 와서 고르기로 하고 그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가게 정문을 걸어 나와 5 ~ 6 M를 지난 거리에서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는 순간, 나는 심장이 멎고, 등줄기기가 서늘함을 느껴야만 했다. 내 손에 조금 전에 사려고 구경하던 욕실 마개 하나가 2달러 가격표가 붙은 채로 나의 왼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나는 도둑질(?)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재빨리 뒤돌아 혹시 누가 본 사람이 없는가 살펴보고 가게로 다시 돌아가 그 자리에 꽂아 놓고 가게를 나왔다. 누군가 나를 봤다면 나는 졸지에 도둑놈이 될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도난 방지 장치라도 있었으면 경보가 울리고 난리가 났을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아무도 보지 않았고, 도난 방지 장치도 되어 있지 않았고, 출입구도 그냥 개방된 형태라 다시 가져다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상황을 되짚어 보니, 내가 물건을 고르는 중에 핸드폰 이어폰을 들고 있던 왼손에 잠시 욕실 마개 하나를 옮겨 잡고나서, 잡고 있던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 한 상황에서 나왔던 것이다. 내가 손에 잡고 있는 것이 이어폰이라고만 느꼈지 전혀 다른 물건이라고 인지를 못한 것이다. 그러고는 오른손에 있던 물건만 걸어 놓고 왔던 것이다. 아주 태연히 정문으로 말이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생각하니 너무 어이가 없기도 하고, 당황스러운 상황을 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일 주인이나 종업원이 내가 물건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생각부터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물론 계산하고 가시라고 정중하게 말했을 수도 있지만, 도둑놈 취급을 했을 수도 있을 듯싶은 것이다. 잘되지 않은 영어로 나도 모르게 내가 물건을 들고 나왔다, 내 실수다 라고 말하면 그 주인은 그것을 믿어 주었을까? 결코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을 수 만 가지로 상상하면서 나 혼자 머릿짓을 하여야만 했다.
세상에는 누군가 일부러 저지르는 일이 있고, 나도 모르게 실수로 벌어지는 일 또한 부지기수로 많다. 하지만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상대가 판단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실수라 하여도 상대가 실수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고의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날 나는 먼 이국땅 싱가포르에서 쪽팔림을 당하거나, 경찰서에서 대사관 직원을 불러 해명해야 할 사건을 저지를 뻔했다. 그리고 새해 액땜을 이렇게 하는구나 생각하고, 앞으론 내 왼손이 하는 일을 항상 오른손과 내 머리도 알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