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에 살어리랏다

[아라리사람들]어느 덧 6년(2021.04)

즐거움이 힘 2022. 2. 1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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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한 때가 20152월이니, 아마도 내가 정선에 공식적(?)으로 첫발을 디딘 때는 20153월쯤 되지 않을까 싶다. 외국 생활을 하기 전부터 한국에 돌아오면 바로 귀농을 하겠노라 결심하고 최적지를 알아보던 중에 정선에 사는 지인의 소개로 지금 집이 있는 회동과 산양삼 농장이 있는 용탄을 소개 받기 위해 왔던 때가 2015년 요맘때이다. 20153월 회동으로 처음 들어갈 때 기억은 아직도 나의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나는 정선읍 북실리 어느 카페에서 지인을 만나 차를 한 잔 마신 후 비행기재 넘어 회동 쪽으로 향했었다. 읍내에서 회동으로 가는 길은 지금과도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비행기재의 허리를 관통한 터널만이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행기재를 넘어 회동으로 가는 길로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내가 마주했던 것은 대형차량 운행을 금지한다는 커다란 표지판이었다. 그 표지판은 어찌나 크던지 내가 몰던 작은 2인승 SUV조차 부딪힐 것 같아 차를 멀찍하게 몰았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정면 하늘 위에 커다란 거인처럼 서 있는 송전탑은 나를 더 놀라게 했었다. 송전탑 주위에 빼곡히 있는 소나무가 그나마 나의 긴장감을 풀어주긴 했었다. 길바닥에 잔뜩 깔려있던 눈인지 염화칼슘인지 분간이 안 가는 하얀 가루는 자동차가 지나감과 동시에 바람에 날렸었고, 그 하얀 가루 사이로 눈에 들어온 작은 묘지들은 이곳이 공동묘지임을 짐작하게 하였다. 출입금지를 알리는 큰 표지판, 높이 솟아있는 송전탑, 바람에 날리는 하얀 가루, 작은 공동묘지 등 낯 설은 풍경은 내가 허락받지 않은 곳을 들어서는 이방인임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입구 야산의 작은 정상에 올라서면 잠시 후 회동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그 길은 꼬부랑길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게 곡선을 그리며 산 아래까지 향했다. 꼬부랑길의 마지막에 다다라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빼려하는 순간, 긴 다리 하나가 이방인에게 길을 안내하듯 직선으로 펼쳐졌었다. 그 밑에는 조양강과 동강을 가르는 경계선이 존재한다고 누군가는 나에게 알려주었다. 다리 끝 막다른 언덕 위에는 교회 하나가 마을로 들어오는 외부인을 감시하듯 초소처럼 서 있었고, 그 교회 앞을 돌아서면 앙상한 겨울 포도나무 가지가 처마에 뒤엉켜 있는 시골 만물상이 나를 정겹게 맞이하였었다. 그리고 이어 용탄 보건서와 용탄 초등학교가 보였다. 초등학교가 있고, 보건소가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오래전 쾌 번화했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보건소 앞을 지나면 시원스럽게 뚫린 2차선 도로 끝으로 거대한 가리왕산이 마지막으로 이방인을 맞이하였다. 이방인인 나는 차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가리왕산의 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나는 20153월 그렇게 가리왕산 품으로 빨려 들어갔고, 몇 달 후 회동리에 자리를 잡고 어느 순간 정선군민이 되었다.

 

며칠 전 정선군 홈페이지에서 귀농인의 귀농 수기를 공모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나는 나의 귀농생활 6년을 정리할 겸 공모에 참여해보기로 했다. 처음 정선에 발을 디딜 때, 귀농 귀촌 생활을 자세히 기록하며 귀농을 꿈꾸는 여러 사람과 공유하겠다는 결심을 하였었다. 아라리사람들 명예 기자 활동도 그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 일에 밀려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공모에 제출할 수기를 쓰면서 그동안의 귀촌 생활을 정리해 보니 나는 정선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고, 정선 사람으로 생활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한 정선 사람 되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나는 오늘도 정선 사람으로서 살고 있고, 정선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공모한 귀농 수기 수상자 발표가 오늘이었지만, 그 발표가 연기되었다고 한다. 6년간의 귀농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글을 쓰긴 했지만 그래도 조그마한 상이라도 받으면 정선 생활이 더욱 행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