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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일기

채식주의자(창비)-한강

by 즐거움이 힘 2018.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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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5한강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수상한다는 소식은 한국 문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일 년에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지 않던 많은 사람의 잠재되어 있던 애국심을 문학계로 향하게 하는 효과를 만들었다. 맨부커상은 노벨 문학상, 콩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누가 선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으로 꼽히는 상으로 영어로 출간된 소설에 수여하는 상이다. 한국 소설 채식주의자가 영어로 번역되어 맨부커상을 받은 것은 문학적으로 아주 놀라운 일이었기에 이러한 현상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채식주의자의 맨부커상의 수상과 함께 문학계에서는 한 가지 논란거리가 수면으로 떠 올랐다. 그것은 번역에 관련한 문제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맨부커상 자체가 너무 큰 이슈여서 그냥 넘어갔지만 2017년 연말부터 다시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적확히 표현하자면 맨부커상은 한강이 수상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와 공동 수상한 것이다. 맨부커상이 영어 출간된 책에 주는 상이기에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다면 받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일부 문학계 사람들은 데보라 스미스라는 번역자가 없었다면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은 없었을 것이라며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일부에서는 영문 채식주의자는 거의 새로운 작품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원작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만큼 번역이 중요하다는 의미로도 읽히기도 했다.

 

뒤늦게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고, 일련의 신문 기사를 보면서 문학에서의 번역을 생각해 보았다

오래 전에 번역된 책을 읽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구절을 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때로는 문맥상 잘 맞지 않는 문장이나 단어가 있는 경우도 가끔 나타난다. 물론 번역자의 단순한 실수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다가 생기는 현상이다. 이런 책을 읽을 때 독자는 책에 빠져 들기 어렵고, 많은 경우 읽기를 중도에 포기하게 된다. 나의 경우도 한국 책보다는 번역된 외국 책을 읽다가 포기하는 횟수가 더 많은데 그것도 대부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반면에 의역되는 경우 번역되어 출간되는 나라의 언어나 문화에 맞게 수정이 이루어지면서 독자는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지만,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적확한 표현을 독자에게 전달 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 위주로 전달하게 된다. 그러니 문장 하나, 단어 하나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의미를 잃게된다.

 

책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직역하는 것이 옳은가? 의역하는 것이 옳은가?는 문학계의 오래된 논쟁꺼리다. 사실, 같은 모국어를 쓰는 사람간에도 말로든, 글로든 전달하는 사람과 전달받는 사람 간에 의도를 다르게 해석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한글로 쓰인 책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서 작가의 의도를 적확히 표현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작업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이번에 발생한 채식주의자도 같은 문제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은 창작자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수용자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채식주의자에서 나타난 번역문제도 어느 판본을 보던 읽는 독자에게 맡기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채식주의자를 읽기 오래전에 이 책의 근간이었다고 저자가 말하는 단편 내 여자의 열매을 우연히 읽었었다. 그래서인지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왠지 낯설지 않았고, 덕분에  어렵지않게 읽었다. 하지만 한강 작가의 책이 나는 아직 어렵다  “회랍어 시간이라는 장편 소설은 완독하지 못한 채 덮은 기억이 있다. 사실 "채식주의자"를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읽기 편했던 것보다 맨부커상을 탔다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내일부터는  완독하지 못했던 회랍어 시간”을 다시 읽어 봐야겠다.  점수 9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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