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군청 기관지 "아라리 사람들"에 명예 기자를 맡으면서 "아리리 사람들"에 기고한 글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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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나는 그동안 경험해 본 적 없는 소음을 견디다 못해 귀뚜라미 한 마리를 잔인하게 죽이고 말았다. 먼저, 나에게 끔찍한 죽임을 당한 그 귀뚜라미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바이다. 사건의 요지는 이렇다. 미처 수탉이 울기 전인 깜깜한 새벽 나절, 나의 침실 근처의 모처에서 귀뚜라미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다. 이 소리는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자연의 소리였으나 나의 단잠을 방해하는 소음이기도 했다. 가끔 집 앞 잔디밭에서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과 벌레 소리는 벽이라는 장애물에 막혀 나를 그다지 고통스럽게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날 귀뚜라미 소리는 마치 알람 울리는 핸드폰을 내 귀에 대고 있는 것처럼 나를 괴롭혔다.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침실 창문 레일에 숨어 있는 귀뚜라미를 집 밖 테라스 쪽에서 어렵게 발견하였다. 비록 나의 새벽잠을 깨운 얄미운 귀뚜라미이지만 이 미물도 자신의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한 본능으로 소리를 낸 것이기에 나는 그 귀뚜라미를 살며시 나뭇가지로 밀어 올려 앞마당으로 내던지는 자비를 베풀었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고, 나의 너그러운 마음 씀씀이에 만족하며 마당에 버려진 귀뚜라미가 다른 곳에서 자신의 짝을 찾아 종족 번식의 꿈을 이루기를 소박하게 빌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내가 자비를 베푼 것과 상관없이 다시 귀뚜라미는 울었고, 옆집 수탉이 울기 전에 또 내 잠은 깨고 말았다. 그 울음소리는 어제 귀뚜라미가 던져진 풀밭에서 울리는 것이 아니라 어제 그 자리, 방 창틀에서 울리는 것이었다. 다시 밖으로 나가 어제 그 자리 창틀로 다가가니 귀뚜라미 한 마리가 나의 인기척에 놀라 창틀 끝에 머리를 처박고 더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그 귀뚜라미가 어제의 귀뚜라미인지는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나에겐 어제의 귀뚜라미와 오늘 귀뚜라미는 같은 것이며, 나의 자비는 어제로 끝이었다. 이틀 연속 나의 소중한 잠을 깨운 귀뚜라미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으면 내일 또 이 귀뚜라미가 나를 괴롭힐 것이기에 나의 자비를 무시한 귀뚜라미에게 형벌을 가해야 했고,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그날 이후 안방 창가 근처에서는 귀뚜라미가 울지 않는다.
아침 일찍 마당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저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 집 뒤편의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하얀 연기 속에 숨어있는 장작 타는 소리. 농사일에 지친 늙은 농부와 그의 아내를 깊은 잠으로 이끄는 풀벌레 소리. 우리는 시골 생활에서 이런 소리를 상상한다. 하지만 정작 농촌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소리는 오간 데 없고, 어느 순간, 대부분의 소리는 소음으로 자신의 정체를 탈바꿈하고 만다. 동트기 훨씬 전부터 우는 옆집 수탉의 울음소리는 그 시작이고, 산 밑 펜션에서 들리는 산짐승 쫓는 개의 소리가 그 뒤를 잇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러한 소음들은 어느 순간 적응이라는 인간의 능력에 의해 다시 소리로 변한다. 그리고 소음의 자리는 곧 다른 소리가 차지하는데 나무를 베는 뒷산의 기계톱 소리가 그렇고, 집 근처 밭의 예초기 소리가 그러하며, 길가 도로 개량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굴착기와 덤프트럭의 경적이 그러하다. 더구나 농촌의 소리는 도시의 소리보다 제 역할을 더 잘 수행한다. 도시보다 맑은 농촌의 대기는 소리가 더 청아하게, 더 멀리, 더 정확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늘 소리에 둘러싸여 생활한다. 우리가 자연과 함께한다는 것은 그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리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연과 농촌의 소리를 소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한 마리 귀뚜라미와 적이 된 나처럼 모든 소리와 적이 된다. 그리고 그 소리라는 적은 소음이라는 모습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진정한 우리가 소음을 이기는 것은 소리를 소음으로 여기지 않는 너그러운 마음이 아닐까 하는 것을 나는 나에게 죽임을 당한 한 마리 귀뚜라미에게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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