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군청 기관지 "아라리 사람들"에 명예 기자를 맡으면서 "아리리 사람들"에 기고한 글들 입니다.
아라리 사람들의 다른 호나 다른 글을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됩니다.
언제였는지 적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날 나는 가해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피해자였던 것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아마도 그 사람은 피해자였기에 나를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며칠 전 인터넷뱅킹용 OTP(보안카드)가 켜지지 않아 새로운 기계로 교체하기 위해 읍내에 있는 농협중앙회 정선지부에 방문했었다. 창구에서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번호표를 뽑았으나 대기 하는 사람이 없어 곧바로 내 번호가 호출되었다. 번호가 표시된 창구로 가니 담당 직원이 낯이 익었다. 그는 나의 피해자였다. 이 날보다 훨씬 전에 나는 전자상거래 업무를 위해 이곳을 방문했었던 적이 있다. 집에서 컴퓨터로 다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던 해당 업무는 반드시 농협에 방문해야만 처리할 수 있는 업무였고, 내 앞에 앉아 있던 이 직원이 그 업무를 담당했었다. 당시 나는 그 상황이 짜증이 났었고, 이 직원과 마주할 때는 짜증이 자가 증식하여 폭발 임계점에 다다른 상태였다. 이런 일로 읍내까지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사사건건 직원에게 시비를 걸었다. 비록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짜증스럽게 항의하는 나의 모습은 직원을 당황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마도 나는 이것을 원했는지 모른다.
아버지뻘 쯤 되는 어른의 짜증 섞인 항의는 어린 여자 직원이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짜증과 항의를 섞어가며 업무를 겨우 마쳤고, 창구를 나서려 일어설 때 직원의 눈에 슬픔이 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애써 외면했다. 이후 다른 일로 농협에 방문할 때면 그때 일이 마음에 걸려 그 직원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 했다. 다행히 세상의 모든 일은 시간이 지나가면 잊혀간다. 가해자의 잊는 시간은 피해자보다 더 빠르다. 하지만 어떤 일에 대해서는 가해자는 잊어도 피해자는 잊지 못한다.
그 일이 있은 후 처음으로 그 직원과 마주 앉아 있게 된 것이 바로 며칠 전이다. 나는 애써 태연함을 간직한 채 OTP 발급을 위한 서류를 작성하는데, 마주 앉은 직원이 어색함을 풀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나는 너의 악행을 기억하고 있다’라는 의미에서인지 혹시 예전에 전자상거래 관련해서 오셨던 분 아니냐고 물었다. 순간 나는 ‘네, 맞아요’라는 짧은 대답과 ‘자리가 바뀌었네요?’라는 형식적인 질문을 했고, 그 직원도 ‘네, 새로운 직원이 와서 바뀌었어요.’라는 질문에 딱 맞는 대답 후 더 이상 업무 외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업무적인 만남 이상의 어색함과 무안함이 장벽이 되어 가로막고 있었다. 은행 업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안했었다는 말 한마디로 풀 수 있는 어색함을 풀지 못하고 돌아오는 나의 태도에 자책했다.
그리고 방금 전 나는 또 농협을 다녀왔다. 오늘은 전에 있었던 일을 반드시 사과하겠다는 결심과 함께였다. 번호표의 지시에 따라 다른 창구에서 은행 업무를 마친 나는 그 직원의 책상에 작은 초콜릿을 놓으며 ‘전에 미안했었어요.’라고 사과했다. 내 말을 들은 직원은 노랗게 염색한 자신의 머리카락이 무색할 만치 환한 미소를 띠며 나에게 잠시만 기다리라하고, 창구 뒤편으로 가 자그마한 농협 봉투에 든 양파 한 망을 가져다주었다. 아마도 이 양파는 최근 양파 값 폭락으로 고생하는 농가를 돕기 위해 농협에서 수매하여 우수 손님에게 사은품으로 주는 것 같았다. 처음엔 안 받겠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내가 초콜릿을 준비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양파를 주는 것 같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창구를 돌아서며 다시 한번 미안했었다는 말을 하고 받은 양파 한 망을 손에 들고 농협을 나서는데, 먼저 사과를 했다는 자랑스러운 마음과 젊은 직원보다 좁은 마음을 가졌던 나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인해 내 얼굴도 손에 든 양파 망처럼 옅은 붉은색으로 물들여지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정선에 살어리랏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년 강원도 청춘만개 및 제3회 정선군 문해한마당 (0) | 2019.09.25 |
---|---|
2019년 강원 문해자랑 청춘만개 및 문해 한마당 (0) | 2019.09.11 |
[아라리사람들]나의 가슴 속 절대 반지 하나(201906) (0) | 2019.08.13 |
굿 보러 가자 (0) | 2019.07.11 |
[문해교육]아이 좋아라(이혜리) 율동 (0) | 2019.06.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