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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에 살어리랏다

[아라리사람들]디지털 시대의 부음(訃音)과 위로[2020.08]

by 즐거움이 힘 2020.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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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군청 기관지 "아라리 사람들"에 명예 기자를 맡으면서 "아리리 사람들"에 기고한 글들 입니다. 

아라리 사람들의 다른 호나 다른 글을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됩니다.


정선군청 소식지 아라리사람들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스마트 폰 등 통신 수단이 발달해서인지 경조사 소식을 듣는 횟수가 점점 많아진다. 그리고 좋은 소식보다 죽음을 알리는 부음(訃音)을 듣는 횟수가 훨씬 더 많아졌다. 아마도 나와 함께 내 주위 사람들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인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경조사 대부분을 문자 메시지나 카카오톡, 페이스북, 밴드 등 디지털 수단을 통해 접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 학교 동창회 밴드에 친구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글이 올라왔다. 그 글은 소천(所天-하늘의 부름을 받아 돌아간다는 개신교에서 죽음을 이르는 말)이라는 낯 설은 단어로 친구의 어머님이 돌아가셨음을 알렸다. 어린 시절 적지 않은 시간을 같이 보냈던 친구이고, 최근에도 만났던 친구이기에 돌아가신 분의 죽음보다 어머니를 잃은 친구 걱정에 가슴이 아렸다. 발인 등 자세한 내용을 보기 위해 글을 눌러 보니 벌써 많은 친구가 글을 읽고 친구의 아픔을 달래는 위로의 댓글을 적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위로의 댓글이 모두 일률적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었다. 거의 10여 개의 댓글이 마치 복사하여 붙여 놓은 것처럼 길게 늘어져 보였다. 마치 장례식장에 늘어서 있는 조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나마 장례식장의 조화는 화원마다 꽃 배열도 조금씩 다르고, 리본 모양이나 글씨체가 달라 구분이 되었으나 스마트 폰으로 보는 댓글은 글쓴이가 표시되지 않았다면 그 차이를 전혀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본문에 적혀 있는 한 줄의 은행 계좌 번호도 눈에 띄었다. 아마 상주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조문하지 못하는 조문객의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계좌를 남겨 놓은 것 같았다. 아니 부음 안내문은 상주가 아닌 상조 회사에서 만들었을 것이고, 먼저 소식을 들은 친구 중 한 명이 밴드에 게시했음을 글쓴이의 이름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부음을 알리는 글을 읽는 동안 상을 당한 친구의 아픔을 위로하려는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왠지 모르는 찜찜함이 스멀거리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 스멀거림의 원인은 내가 아직도 이러한 디지털 부음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기술의 발달로 경조사 문화는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이번 코로나19 사태 이후 급속히 변화하게 될 것을 우리는 짐작한다. 앞으로 다수의 사람이 모이는 경조사는 상당히 줄어들 것이고, 가상 인터넷 공간을 통한 알림, 조문, 계좌 이체로 대체될 것임을 나도 안다.

부고 글에 댓글을 단 친구들은 상을 당한 친구의 아픔에 동감하고 위로하려는 마음으로 댓글을 썼을 것이다. 어떤 글로 위로를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자신보다 먼저 댓글을 남긴 친구 글을 보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가장 평범하고 일반적인 위로 글을 썼을 것이다. 나는 똑같은 댓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친구들의 고민을 조금은 이해한다. 계좌번호를 남길 수밖에 없었던 상을 당한 친구의 마음도 충분히 안다. 하지만 나의 마음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찜찜함도 어쩔 수 없었다. 그 찜찜함은 밴드에 올려진 수십 개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와 통장에 찍힐 부조한 친구의 이름과 액수가 과연 상을 당한 상주에게 위로의 마음으로 전달될까 하는 것이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죽음을 알리는 부음의 방식과 아픔을 함께 하려는 부조의 방식은 바뀌겠지만 남겨진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가서 손을 잡아 줄 수 없다면 조금은 다른 표현으로 위로하는 방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부음과 부조는 디지털로 변화하더라도 위로만은 아날로그로 남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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