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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8시, 아내가 서울에 갔다가 고속버스를 타고 원주로 온다고 하여 터미널로 마중 나갔다. 내일이면 또 각자 흩어져야 하는 원주의 일요일 밤이다.
아내가 탄 버스보다 내가 일찍 도착하여 골목길에 차를 주차해 놓고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다. 일요일임에도 일이 많아 종일 사무실에서 컴퓨터와 씨름했더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아내가 도착하면 같이 먹겠다는 생각에 저녁 끼니도 해결하지 못했더니 배도 몹시 고프다. 아내를 기다리면서 무엇을 먹을까 생각한다. 아내는 뭘 좋아하나? 나는 지금 무엇이 먹고 싶은가? 하며 이런저런 음식 생각을 하니 벌써 입에 침이 고인다. 여행도 그렇고, 음식도 그것을 먹는 순간보다 그것을 먹기 위해 상상하는 시간이 더 즐겁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상상을 하던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발신자를 보니 아들이다. 엄마가 멀리 서울 다녀오는 것이 걱정되어 전화했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받으니 첫 마디가 “오늘 저녁 어떻게 할 거야?”라고 말한다. 집사람과 오붓하게 저녁을 먹고 들어가겠다는 상상이 깨지는 순간이고, 나의 상상이 쓸데없어지는 순간이다. 아들의 물음은 늦은 시간인데 저녁은 드셨냐? 라고 묻는 안부의 말은 아닐 것이고, 자신이 지금 집에 왔는데 자기 저녁 끼니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즉, 나의 밥을 챙겨달라는 말로 나에게는 들린다. 휴일에 서울 볼일을 보고 오는 엄마나, 일요일에도 사무실에 나가 일하고 엄마를 마중 나온 아버지에게 자기 저녁 꺼리를 걱정하는 말을 하는 아들이 매우 철없어 느껴졌다. 물론 그 물음에는 일요일 밤에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싶다는 매우 가정적인 뜻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를 아직 만나지 않아서 모르겠어“라는 화가 묻어난 짧은 말을 소심하고, 퉁명스럽게 던지고 전화를 끊었다. 아들의 전화에 서운하기도, 속상하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자니 곧 아내가 탄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했고, 아내는 나의 차에 올라탔다.
저녁 안 먹었지? 저녁 어떻게 할까? 라고 말하는 아내에게 아들의 만행(?)을 얘기했더니 아내 또한 아들 흉을 보기 시작한다. 서른이나 된 남자 놈이 어쩜 그럴 수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며 나의 의견에 맞장구를 치며 혀를 찬다. 다행히 나의 편이 생겨 나는 맘이 편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채 풀어지기도 전에 아내는 ”감자탕을 포장해 갈까?“라고 말한다. ”감자탕 먹고 싶어?“라는 나에게 아내는 ”며칠 전에 아들이 감자탕 먹고 싶다고 하던데......“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넨다. 순간 나는 무더운 여름에 차가운 하드(?)를 먹은 후처럼 머리가 아파졌다. 조금 전만 해도 철없는 아들을 흉보며 비난하던 아내가 그 말이 미처 공기 중에 흩어지기도 전에 아들이 며칠 전 먹고 싶다고 했다며 그 음식을 포장해 들어가자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눈을 흘기며 바라보니 본인도 그제야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는지 박장대소한다. 나는 웃음을 터트린 아내에게 그렇게 아들 흉을 보더니 어떻게 그렇게 표리부동할 수 있느냐며 타박을 주었다. 그때까지도 큰 소리로 웃던 아내는 ”사랑하는 자식인데 어떡해...... 밉더라도 밥은 먹여야지.“라며 말끝을 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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