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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여행

[스리랑카 여행 11 - 7일 차]캔디(kandy) 그리고 캔디 축제 시작

by 즐거움이 힘 2014.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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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산책을 위해 숙소를 나섰다. 이 숙소에서 하루를 더 자는 것은 참을 수 없어서  다른 숙소를 찾아야 하기도 했고, 지난번에 왔을 때 전혀 구경하지 못 했던 캔디 시내 구경을 하기 위해서였다. 길을 나서니 전에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나타났다.



날은 아침부터 잔뜩 흐려있었다. 오늘 밤에 있을 캔디 축제가 비가 와서 취소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다. 스리랑카는 불교 도시이고 특히 이곳 캔디는 석가의 치아 사리가 모셔있는 불치사(佛齒寺)가 있어 이곳저곳에서 부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구나, 캔디는 예전 스링랑카의 수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오랜된 서양식 건물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갈레(Galle)에서 보았던 근대 서국식 건물들이 여기서도 볼 수 있었고, 도로 한 가운데는 사람은 별로 다니지 않지만, 아래 사진과 같은 서구식 형태의 지하도도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 곳곳에는 여러 사람들의 동상도 서 있었는데 누구의 동상인지는 잘 몰랐다. 다만 머리에 새 똥을 뒤집어쓴 것이 조금 안쓰러웠다.



오래된 건축물들은 대부분 호텔로 쓰이고 있었고, 호텔 한 쪽에는 오늘 밤에 있을 캔디 축제를 위하여 여기저기 시설물을 손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축제를 보는 관객들의 좌석인 듯 싶었다.



우선 오늘 밤에 묵을 숙소를 정하기 위해 레이크방갈로로 향했다. 다행히 오늘 방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방 값이 너무 비쌌다. 처음에 잤을 때는 2,500루피였는데, 지금은 4,000루피라고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방 값이 두 배로 오를 것이라는 것은 떠나기 전부터 얘기를 들었기에 오늘은 이곳에서 묵기로 했다. 그리고 캔디에서 가장 유명한 불치사(佛齒寺)로 향했다. 저 멀리 호수 건너편으로 불치사가 보였다. 




캔디 축제 기간이라서 그런지 굉장히 경비가 삼엄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스리랑카는 오랜동안 내전을 겪었고, 특히 이곳 불치사는 아주 오래전에 거대한 폭탄 테러를 당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축제 기간 동안은 많은 군인과 경찰이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고, 심지어 축제 기간에는 모든 와인숍(술파는 가게)가 문을 닫는다고 한다.



짧은 바지 차림으로 왔더니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그런데 다행히 배낭안에 작은 무릎담요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치마처럼 두르기로 했다. 


담요을 두르는 나의 모습이 우스웠던지 경비원이 직접 둘러주었다. 남자들도 치마 형태의 옷을 입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손놀림이 자연스럽고 담요는 굉장히 단단하게 동여 메졌다. 


이곳은 신발도 벗고 들어가야 하고, 내국인과 외국인 입장료가 다르다. 우리는 10$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신발을 맡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은 무료로 맡긴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휴일이라서 그런지 많은 스리랑카 현지인이 있었다. 이곳은 불교를 믿는 스리랑카인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상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헌화하고, 앉거나 서서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각자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 그리고 나라의 안전과 행복을 기원하는 듯했다. 불치사(佛齒寺)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큰 사원이었고, 2층에는 별도의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을 들어서자 안내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설명을 해준다.


이곳이 폭탄 테러를 당해었다는 이야기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매년 불치제를 지냈으며, 부처님의 치아 사리는 왕의 상징이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부처님 치아 사리는 7년 한 번 공개되며, 불치사 방장스님, 전국 신도회장, 문화부 장관이 3개의 열쇠를 돌려야 열 수 있다고 한다.


설명이 끝나자 안내원은 조용히 가이드비를 좀 달라고 했다. 원래는 받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오랜 시간동안 자세히 설명을 해줘서 1,000루피를 주었다. 



보통 해외 유적지를 돌다보면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안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대부분 무료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일정 정도 안내비를 줘야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미리 얘기되면 좋은데, 미처 모르는 상태에서 얘기를 다 듣고 나중에 가이드비를 요구하면 마치 사기를 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 원하지 않았는데 설명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항상 비용이 얼마인지 물어보는 것이 나중에 실랑이를 피할 수 있다.



또 불치사 내부에는 여기저기 기부를 하는 통이 있다. 어떤 곳은 기부통만 있는 곳도 있고 어떤 곳은 절을 시키고 기부하라는 말을 한다. 그러니 기부할 수 있는 돈을 조금 가지고 가거나, 마음 준비만이라도 해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기부하는 곳에는 1,000루피 짜리의  돈이 샘플로 놓여있는데 꼭 그 만큼의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 



불치사 외부에는 오늘 행사를 준비하는 코끼리들도 있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모든 꼬끼리의 발은 커다란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코끼리로 인한 만일의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겠지만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행사 때에는 사슬이 풀릴까했는데, 이날 밤 거리 행진에서도 쇠사슬을 한 채로 코끼리들은 행진을 해야했다.



불치사 여행을 마치고, 이제 짐을 가지러 숙소로 향했다. 전에는 기억에 없던 시계탑도 보였다. 한참을 걷다가 역 주위에서 낮익은 사람을 만났다. 지난 주 캔디에 왔을 때 우리를 태웠던 자칭 블랙보이였다. (아래 글 참조)


2014/08/09 - [여행/스리랑카] - [스리랑카 2 - 1일 차]캔디(Kandy) 도착, 숙소, 그리고 시기리야로 출발


오늘은 숙소에서 쉰 후 밤에 캔디 축제 거리 행진을 볼 것이라 다른 관광지 여행 일정이 없어 툭툭를 타지 못하고, 잠시 인사 후 기약없는 다음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아래는 그 툭툭 청년(사실, 두 아이의 아빠라고 하였다)의 명함이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무단 횡단을 하여 숙소로 향하는데, 어디선가 우리를 향한 클라션 소리가 들렸다. 무단 횡단을 했다고 화를 내는 운전자라고 생각하고, 무시하고 가려는데, 또 클락션 소리가 났다. 소리나는 곳을 보니 어떤 사람이 오토바이를 세운 채 우리에게 클라션을 울려되는 것이다. 대체 뭘까하는 마음으로 그를 보고 있는데, 그가 헬멧을 벗었다. 헬멧을 벗은 후에도 우리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그런데 헤이 코리안 이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그는 콜롬보에서 버스를 타고 캔디로 오려고 할 때 완행 버스에서 우리를 안내하고, 심지어 자리까지 잡아 주었던 그 사람이었다. 당시 선의를 뿌리치고 도망가 듯이 버스에서 내렸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어색하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캔디에서 만난 우리가 반가와 인사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우리는 서로 눈 인사와 목례 그리고 웃음으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인사를 하며 헬멧을 다시 쓰고, 가던 길을 다시 갔다. 캔디라는 동네가 좁아서 일 수도 있지만,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래글 참조)


2014/08/22 - [여행/스리랑카] - [스리랑카 10 - 6일 차]갈레에서 캔디까지, 그리고 너무 친절한 스리랑카 사람들




숙소로 돌아와 재빨리 짐을 챙겨 나왔다. 혹시 베낭안에 바퀴벌레라도 들어갔을까봐 베낭을 몇 번이나 털고, 다시 쌌다. 우리가 더 머물것이라고 생각하고 나가는 날 비용을 받겠다했던 주인에게 재빨리 방값을 지불하고, 툭툭을 탔다.  레이크 방갈로까지 200루피를 내고, 그곳에 도착하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지난 주에 묵었던 맞은 편 방을 얻었다. 방의 구조는 비슷했으나 그 방보다 더 좋았다. 


어제 저녁 오히려 더러워질까봐 감히 씻지 못했기에  이곳에서 더운 물로 씻고 한잠 늘어지게 잔 후 드디어 캔디 축제의 거리행진을 보러 떠났다.


거리에는 가끔씩 비가 내리곤 했으며, 여기저기 군인과 경찰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4시가 넘어가자 행진이 이루어지는 거리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우리도 재빨리 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비가 내리다 멈추다를 반복해 비닐을 두 개를 200루피에 샀다. 처음엔 이것이 비옷인 줄 알았는데, 막상 펼쳐보니 그냥 색깔있는 비닐 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비가 올때 마다 하나는 자리에 깔고, 하나는 머리에 둘러쓴 채 통해 저지선 경찰들 앞에 자리를 잡았다.




좌석을 예약한 아래 사람들은 사진처럼 건물안에 설치 된 의자에 앉았다. 저 자리에 앉으려면 최소 3,000루피에서 9,000루피 비용을 주어야 한다. 원래는 9,000루피지만 현장에 오면 자리가 남은게 많아 3,000루피에 호객을 한다. 우리는 끗끗하게 그냥 거리에 앉기로 했다.


많은 외국인들은 저렇게 자리를 잡았고, 일부 젊은 여행객과 현지인들은 우리와 같이 도로변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물론 도로변은 무료이다. 모든 상가는 도로쪽으로 나 있는 입구에 빽빽히 의자를 놓고, 좌석을 판매했다.


거리에는 온 갖 잡상인들이 다니며 물건을 판다. 먹을 것부터 장난감까지 정말로 축제장 같다.


시간이 갈 수록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었다. 이제 인도에는 앉을 자리가 없다. 자리를 못 잡은 사람들은 행진 끝 쪽으로 가서 보던가 서서 볼 수밖에 없다.


거리 행진이 시작할 시간이 되자 중 무장한 군인들이 제일 먼저 거리를 검색한다. 모든 하수구를 검사하고, 폭탄물 탐지 장비로 여기 저기 흩어본다. 아주 내전의 아픔과 오래전 있었던 폭탄 테러의 기억이 아직도 있는 듯 싶었다. 최종적으로 책임자로 되어 보이는 사람이 시찰을 하면서  내 앞으로 지나가다가 어디서 왔냐고 나에게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반갑게 코이카 때문에 한국을 방문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악수를 청한다. 어떨결에 서로 인사를 했다. 



군인들이 지나가고 시간이 되자 어디선가 폭음 소리가 난다. 우리는 어디선가 축제 시작을 알리는 폭죽을 터뜨리는구나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잠시 후 우리는 그 소리의 진상을 알 수 있었다. 아주 큰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10여명이 나타나더니 그들이 채찍을 휘두르는데, 마지막에 크게 휘두르는 소리가 마치 폭죽을 쏘는 소리처럼 크게 들린 것이다. 저 채찍에 맞으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없겠다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것은 어떤 의미일까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크게 채찍을 휘두리고 나면 사람들이 거리에 동전을 던졌다. 아마도 축제의 시작에 대한 기부(수고비)로 보여졌다. 힘차게 채찍을 휘두른 후 그들은 수 없이 떨어지는 동전을 주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던져줄 만한 어느나라 동전도 하나도 없었다.



이들이 지나간 후 뒤이어 노래와 음악 소리와 함께 횃불을 들거나, 원형 횃불로 곡예를 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들어오면서 캔디 축제의 거리 행진이 힘차게 시작되었다.



사족!

여행 떠나기 전 캔디 축제 관련된 정보를 여기 저기서 찾았으나 정확한 날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캔디에 도착하여 보니 캔디 축제를 8월 1일부터 한다고 하였다. 캔디 축제는 매년 10일 동안 음력으로 환산한다고만 알려져 있었다그래서 나름 계산을 해보니 캔디 축제는 매년 음력 7월 6일부터 7월 15일까지 10일 동안 하는 것 같았다. 즉, 달이 반달에서 보름달로 만들어지는 동안 이루어지는 행사인 것이다. 우리로 따지면 추석 한 달 전이다. 나름 나의 추측이니 캔디 방문 예정이 있다면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가기 전 반드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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